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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영 개인전 [광화문점] 2010 .10 .21 - 201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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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영 개인전

2010.10.21(Thur) ~ 10.30(Sat)



소소한 일상, 물아일체의 판타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과거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통이 있는 한국에서 여성은 언제나 수동적이어야 했고,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들을 억압당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가 많아지고 전문직 여성의 수가 점차 증가함으로써 남성들과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 대한 내조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외면할 수도 없다. 특히 여성작가로 살아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요구받는 여성상은 과거처럼 그냥 착하고 내조 잘하는 현모양처가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이 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을 겸비한 여성이다. 

김상영의 근작들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를 캐릭터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캐릭터가 작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닮아 있다. 그는 이 캐릭터의 특성화를 위해 자신의 외형에 다른 캐릭터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합성했다. 이마에 두르고 있는 별이 박힌 머리띠는 잘 알려진 원더우먼의 것이다. 1970년대에 TV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원더우먼은 남성들이 득세한 사회에서 아름답고 부드러운 여성미에 뛰어난 지성과 초월적 힘을 겸비한 모든 현대 여성의 영웅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에 원더우먼의 머리띠를 두름으로써 당면한 일과 문제들을 원숙하고 당당하게 처리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또 이 캐릭터의 얼굴 표정이나 포즈를 보면 베르메르의 작품 <진주귀걸이 소녀>가 연상된다.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공허하게 응시하는 이 소녀의 멍한 표정은 무언가에 쫒기고 불안한 감정을 상쇄할만한 무심함이 엿보인다. 우리가 주관적 편견과 이성적 판단 없이 대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외부 세계의 존재들과 하나로 동화되어 훨씬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것들과 감각적 동화를 이룸으로써 현실에서의 분리의식을 제거하고 물아일체의 명상적 행복감을 추구한다.
남성들을 무찌를 정도로 강력한 원더우먼의 힘과 진주귀걸이 소녀의 순수한 백치미는 현실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여성의 양면성이다. 작가는 이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두 모델을 결합하여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자신의 현실적 억압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이 가상의 분신들은 작품에서 깔끔한 드로잉으로 그려진 꽃이나 과일, 또는 일상용품들과 어우러진다. 이러한 소재들은 작가의 관심사와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평소에 식물 기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집과 작업실 주변에는 직접 기르는 꽃과 야채들로 가득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식물들은 과거 사군자를 그렸던 문인화가들처럼 자기 주변의 식물들과 대화하고 교감하며 느낀 정서를 담고 있다. 또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장품이나 주방기구들도 여성으로서 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친근한 도구들이다. 그의 화면은 자신의 일상과 함께하는 이러한 소재들이 부유하고 중첩되며 공간을 만들고, 여기에서 가상의 분신들이 아줌마 특유의 엉거주춤한 포즈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 포즈들은 큰 붓을 들고 있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노트북으로 컴퓨터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과거의 작품들과 달리 이러한 근작들은 구상적인 드로잉이 주조를 이룬다. 그는 인간과 식물, 기물 등 다양한 존재들을 하얀 바탕에 같은 두께의 드로잉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인간중심적 시선이 아니라, 주종의 관계가 사라지고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따스한 교감을 나누는 존재의 그물망을 형상화한 듯하다. 김홍도가 즐겨 사용했던 원형구도와 동양 특유의 풍부한 여백 속에 그려지는 이러한 작품들은 자신의 현대적 삶의 감정을 다룬 일종의 풍속화이다. 이 풍속화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원망이 아니라 작은 일에 열중하는 여인들의 무심함이다. 마치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처럼, 그들은 인간의 정치적 야망이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벗어나 소소한 일상의 것들과의 교류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들이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 희로애락의 감정이 사라진 무심한 상태에서 대상과 분리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에 오는 물아일체의 판타지. 작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이러한 상태를 경험하고 표현함으로써 불안하고 공허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한다. 

깔끔하고 세련된 드로잉으로 그려진 이러한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크랙 마틴(Michael Craig-Marin)이나 줄리언 오피(Julian Opie) 같은 팝아트를 연상시키지만, 이들의 차가운 개념과 기계적인 특성과 달리 김상영의 작품은 매우 따스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팝아트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심리와 대상과의 교감에서 오는 미세한 떨림을 반영하고 있다. 워홀이 주도한 팝아트는 작가 내면의 일회적인 아우라를 추구하는 추상표현주의의 반발로 나타났고, 일상적이며 기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김상영은 일상을 끌어들이면서도 내면의 정서를 반영함으로써 상반된 것으로 인식된 팝아트의 표현주의를 공존시키고 있다. 이것은 현대적 감수성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작가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중년의 나이에 자신의 일상을 팝적으로 풀어낸 근작들은 구작들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고 작가로서 모험적인 승부수가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젊은 작가들과는 다른 중년여성의 체취와 자신만의 정서를 잃지 않은 점은 큰 폭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이러한 변신은 일시적으로 기술적인 숙련도의 약화를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과 삶을 투영시킴으로써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보다 생생하게 삶의 리얼리티를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물아일체라는 문인화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정서와 한국적 정체성의 접점을 찾은 것도 큰 성과로 보인다. 이런 개념적 재정비로 인해 이번 전시회는 작가의 전기 화풍을 마감하고 후기 화풍의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이 될 것이고, 새로운 양식에 젖어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농축된 작품들이 양산되리라 기대된다.   

■ 최광진(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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