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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이인철 2인전 [광화문점] 2010 .11 .17 - 201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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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강렬한 속성인 ‘분열증’이,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인 자본주의와 분열증 완결판 《천 개의 고원》을 밑거름으로 일궈낸 사유를 바탕으로 두 작가의 이미지는 한 공간에서 연결-접속한다. 이른바 화쟁-네트워킹(和諍-networking)이다. 화쟁이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얼싸안고 하나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 각양각색이 인드라망으로 촘촘히 짜여진 인식체계인 화엄을 가리킨다. 사유하는 과정을 사유한 판비량론을 지은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대로 천 개의 고원이 아닐까? 이번 전시가《천 개의 고원》에 줄을 대긴 했지만, 천 개의 고원은 바로 천 개의 고원으로 인식 가능한 패러다임이 아닌가. 우리는 이미 들뢰즈다.

후진 예술가는 표절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횡령한다던가(The bad artists imitate, the great artists steal by Picasso). 위대한 예술가란 중국의 기괴한 철하자 이탁오가 말했던 ‘化工’이다. 무릇 예술가는 화공이 되어야 ‘작가’라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철학이라는 공상과학소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의 철학 작업을 “비역질로 낳은 괴물”이라 냉소했던 들뢰즈. 세계금융위기라는 거대한 괴물의 출현으로 출발한 21세기는 바야흐로 들뢰즈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가? 

“늑대 인간은 목구멍 속에 모든 늑대들을 간직한 채, 자기 코 위에 모든 작은 구멍들을 간직한 채, 자기의 기관 없는 몸체에 저 모든 리비도적 가치들을 간직한 채 누워 있다. 전쟁이 다가올 것이고 늑대들은 볼셰비키가 될 것이고 <인간>은 그가 말해야만 했던 모든 것들 때문에 숨이 막힌 채로 있게 될 것이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천 개의 고원》 
1914년ㅡ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에서 

작가들은 볼셰비키 운운해놓고는 짐짓 딴청을 부리고 있다. 볼셰비키는커녕 혁혁한 혁명의 기운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뭐 하자는 건가? 이번 전시의 제목인 <늑대들은 볼셰비키가 될 것이고>는, 늑대 공포증에 시달리는 부유한 러시아 청년의 유아기 신경병력을 다룬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을 비판한 고원에서 끌어온 한 귀절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빠-엄마-나’라는 가족 삼각형으로 환원되는 프로이트의 모든 임상분석을 격렬하게 비난한다. 

전시는 대안 제공처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을 만들고 시대의 조건을 드러내는 일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전시를 통해서 작가도 관객도 구경꾼으로서 이 시대를 사유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통절한 책임이나마 느끼게 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예술행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작가가 그림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작가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작가들이 전시를 구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시가 작가들을 부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하여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 하야도” 좋은 것이다. 동서 춤추소? 그런대로 맥거핀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만큼은 되는 것이다. 그만큼은. 혁명을 주문하는? 그게 어딘가?    ■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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